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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김재규 비서실장 재심 묘지 사망 자녀 부하 가족 아들 장군 중앙정보부장

by 도나도나킴 2025. 2. 19.

얼마전 법원은 사형을 선고받은 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재심을 개시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번 글에서 김재규 인물과 관련 정보를 안내해 드립니다.

 

김재규
김재규

 

 

1. 김재규 비서실장 프로필 묘지 가족

 

김재규는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입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으며,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전가옥에서 열린 만찬 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10.26 사건을 일으킨 인물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10월 27일 체포되었으며, 1980년 5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김재규는 1926년 4월 17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이문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김녕 김씨입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학창 시절 안동농림고등학교와 대구농업전문학교 중등교원 양성소를 졸업하였으며, 이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를 거쳐 육군보병학교, 육군포병학교, 육군공병학교, 육군대학을 졸업하며 군사 교육을 받았습니다.

또한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산업공학과 공학석사 학위와 정치외교학과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는 군과 정치 분야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습니다. 1973년 12월 4일부터 1974년 9월 18일까지 제5대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재직하였으며, 1974년 9월 18일부터 1976년 12월 5일까지 제11대 건설부 장관을 역임하였습니다. 이후 1976년 12월 6일부터 1979년 10월 27일까지 제8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임하였습니다.

 

그의 호는 덕산 또는 덕촌이며,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에 거주한 바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 10.26 사건의 중심 인물로,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지역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며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진 인물이었고, 덕분에 김재규 역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김재규는 3남 1녀(딸 김수영, 양자 김민수)를 두었으며 이는 아내 김영희(정실), 장정이(내연녀) 사이에서 얻은 자녀들입니다.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후 김영희와 재혼하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외동딸 김수영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김영희와의 혼인 외에도 그는 당시 유명했던 요정 선운각의 마담이었던 장정이와 인연을 맺었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장정이는 과거 유부녀였으나 이혼 후 김재규와 함께 지냈으며, 김재규는 공병부대를 동원해 서빙고동 중경학원 용지에 약 200평 규모의 고급 주택을 지어주고 15년간 동거했다고 전해집니다. 장정이는 요정업계에서 강한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몸빼', '억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에 대해 김영희는 단 한 번도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을 밝힌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가족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부인 김영희와 동생 김항규는 고문을 당하고 재산까지 몰수당했으며, 주변인들까지 심한 탄압을 받아야 했습니다. 특히 ‘3족을 멸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족과 가까운 이들에게까지 고초가 이어졌습니다.

 

김재규 동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재규는 생전에 남은 재산을 부하 가족들을 위해 사용해달라고 유언을 남겼고, 부인 김영희는 그의 뜻을 따라 부하들의 자녀들에게 교육비와 생활비를 지원하며 헌신했습니다. 덕분에 이들 자녀들은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재규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 삼성공원묘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묘비에는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비’라는 글귀가 새겨졌습니다. 원래 그는 유언을 통해 ‘의사 김재규 장군 묘’라는 문구를 남기길 원했지만, 신군부의 방해로 이를 이루지 못하다가 1989년이 되어서야 광주·전남 송죽회의 주도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누군가에 의해 ‘의사’와 ‘장군’이라는 글자가 훼손되고, 추모비가 넘어지며 금이 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유족과 송죽회는 훼손된 상태 그대로 남겨두기로 했는데, 이는 이러한 모습 또한 역사적 기록의 일부라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2. 김재규 비서실장 박정희 관계 내란 부하 사형

 

김재규는 박정희의 동향 후배이자 육사 2기로 박정희와 동기입니다. 1943년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으로 선발되어 전투기 조종 훈련을 받았으나, 해방을 맞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로 입교하였고 1946년 12월 졸업하였습니다. 이후 군 생활 중 부대 내 사망사고의 책임을 지고 면직되었으나, 교사 생활을 거쳐 다시 복직하였습니다.

 

 

1952년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1954년 육군 제5사단 36연대장, 육군 제101연대장을 역임하였으며 1956년 준장으로 진급하였습니다.

 

박정희

 

이후 육군대학 부총장, 보병 제6사단장, 육군 제6관구사령관, 육군 보안사령관, 육군 제3군단장을 거쳤습니다. 1964년 6.3사태 당시 계엄군을 지휘하며 박정희의 신임을 더욱 얻었으며, 1973년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습니다.

 

 

1973년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1974년 건설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중동진출 정책을 지원하며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 시기부터 유신 정권의 독재 유지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며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긴급조치령 남발과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정보수집과 사태 무마의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김재규는 1979년 YH 무역 사건, 김영삼 국회의원 제명 사건, 부마사태 등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지는 과정에서 유신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강경파인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과의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차지철과 이를 옹호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열린 연회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사살하며 10.26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며, 1980년 1월 28일 육군 고등계엄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앞서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주범으로, 당시 중앙정보부장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박정희의 강력한 독재적 통치에 반발하며 암살을 결심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몇 명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김재규의 부하들은 그의 명령을 따르며, 박정희 암살을 실행하게 되었습니다. 주요 부하들은 박선호, 이기주, 김태원, 유성옥 등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에서 일하던 고위직들이었습니다.

 

김재규는 박선호, 이기주, 유성옥 등에게 박정희를 처치하고 경호원을 제압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이들은 예기치 않게 암살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부하들이 매우 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이었으며, 자신에게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980년 1월 28일,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은 군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김재규는 부하들에게 관대한 처벌을 요청했으나 결국 모두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김재규와 부하들은 1980년 5월 24일에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특히 김계원은 10·26 사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습니다. 김계원은 사건의 직후 구속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고, 군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김계원

 

김계원은 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결국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김계원은 사건 당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지만, 실제로 박정희 암살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계원은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죄로 기소되었고, 김재규와 그 외 부하들과 함께 법적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김재규는 1심 최후변론에서 자신의 10.26 거사 목적을 다섯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자유민주주의 회복, 국민 희생 방지, 적화 방지, 미국과의 관계 회복, 국제적 명예 회복이 그 목적이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부마항쟁을 강경 진압하려 했으며, 차지철 경호실장이 대량 학살도 불사하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고 말하였으며, 그의 행동이 사전 계획된 것이 아니라 급조된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장준하 측근을 돕고 김대중을 석방해 김영삼과 만나게 하는 등의 행보를 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었던 인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암살 당시 안가에는 육군 참모총장과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가 대기 중이었으며, 정승화 총장도 김재규에게 속아 궁정동에 왔다고 변호사에게 밝힌 바 있습니다.

 

 

 

과거 김재규는 재판에서 자신의 행위를 민주화를 위한 혁명 거사라고 주장했으며, 이전에도 대통령 시해를 준비했으나 실행하지 못했다고 변호인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혁명을 했다"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전달하고 싶었으나 결국 동생에게 다급히 전해야 했으며, 12·12 군사반란은 군부 내 사조직이 주도했지만 당시 국민들은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10·26 사태 직전 CIA 한국지부장과 면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 개입설이 제기되었으나,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이를 부인했습니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며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살해를 지시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으나, 그의 동생 김정숙 씨는 김재규가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시각과 부정적 시각으로 나뉩니다. 긍정적인 평가에서는 그가 역사적으로 재평가될 때 한국 민주주의가 확인된다는 주장과 함께, 간첩사건 조작과 거리가 먼 인물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또한 부마항쟁 당시 시위 주동자들이 박정희 사후 면소 판결을 받았으며, 신군부가 김재규를 부정적으로 몰아가기 위해 언론을 활용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반면, 부정적인 평가에서는 박정희 딸 박근혜 전 대통령이 김재규의 행동을 배신이자 패륜으로 규정하며, 유신 체제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면 직접 이야기했어야 했다고 비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2025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10·26 사건 당시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후 45년 만에 재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서울고법 형사7부는 김 전 부장에 대한 재심을 개시하기로 결정했으며, 재심 청구를 한 유족들은 신군부의 불법적 개입으로 재판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며 재심을 요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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