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프로필 근황 나이 대통령 대선 아들 부인 경력
이회창은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서 국무총리, 대법관, 정당의 총재등을 지낸 인물입니다. 이번 글에서 그의 프로필과 경력 평가 근황까지 모두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이회창은 1935년 6월 2일 일제 강점기 황해도 서흥군 신막면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정치인입니다. 2024년 기준 89세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본관은 전주이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는 대법원 대법관을 비롯해 제8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제15대 감사원장, 제26대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공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정치인으로서도 활동이 두드러져 제15·16·18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신한국당 대표위원과 총재, 한나라당 총재 및 상임고문, 자유선진당 총재와 대표, 새누리당 상임고문, 바른정당 상임고문을 역임했습니다. 그의 지역구는 서울 송파구 갑, 충남 홍성군·예산군이었으며 비례대표로도 활동했습니다.
가족으로는 부친 이홍규와 모친 김사순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배우자는 한인옥입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습니다.
군 복무는 공군 대위로 마쳤으며, 천주교 신자로 세례명은 올라프입니다. 참고로 아내 또한 판사였는데 선배 판사의 소개로 결혼한바 있습니다. 아버지는 한성수 대법관이였습니다.
특히 이회창은 법조인과 정치인으로 다양한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는 제26대 국무총리, 대법관, 감사원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등 중요한 공직을 맡았으며,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에서 총재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법조인으로서 그는 '대쪽 판사'라는 별명을 얻으며, 여러 중요한 판결을 남겼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감사원의 위상을 확립한 주요 인물로 평가됩니다.
정치적으로는 국무총리, 대법관, 국회의원, 감사원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등 다양한 직책을 맡으며, 김종필, 정세균과 함께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직책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그는 세 차례 대선에 출마했으며, 두 차례는 대세론을 형성하며 50% 이상의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선에서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아쉽게 패배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회창은 원칙과 정공법을 강조하는 정치인으로, 3김 정치에 실망한 국민들에게 새로운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신선한 이미지는 많은 지지를 얻었으나, 여러 스캔들이 발생했을 때는 그의 철저한 원칙이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제15대 대선에서는 자신의 청렴하고 도덕적인 이미지를 앞세워 개혁적 보수주의를 주장했지만, 선거에서 패배한 후에도 당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총재로 재선출되었습니다.
이회창의 리더십은 보수 우파 정치계에서 큰 영향을 미쳤으며, 두 번의 대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큰 정치적 입지를 유지했습니다.
그의 청렴도는 공직자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이었으며, 친인척들의 비리 의혹도 거의 없었습니다. 아들들의 병역 비리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이 역시 최종적으로 위반 사항이 없다고 밝혀졌습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항상 승리했으나, 대통령 선거에서는 세 차례 모두 패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대와 16대 대선에서 각각 1.6%, 2.3%의 차이로 석패하며, 17대 대선에서 독자 출마하여 15%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거비를 전액 보전하는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이회창의 정치적 지지 세력이 여전히 강력했음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이회창은 정치 활동을 하면서 강한 자기 주장을 펼쳤지만, 포용성 부족으로 여러 갈등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3김 정치 청산을 강하게 주장하며 김영삼을 비판하고 1997년 12월 17일에는 "김영삼 정권과 다른 미래를 향한 새 정권을 탄생시키겠다"고 선언하며 김영삼을 철저히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달 전인 1997년 9월 30일, 대구에서 열린 신한국당 전당대회에서는 김영삼과 손을 맞잡고 모습을 보였고, 이로 인해 그의 정치적 모순과 갈등이 부각되었습니다.
김영삼의 회고록에 따르면, 1997년 9월 8일 청와대 만찬에서 이회창은 김영삼에게 여러 차례 "충성을 다하겠다"며 감사 인사를 드렸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당시 신한국당 내에서 이회창이 당리당략에 따른 꼬리 자르기를 했다는 비판을 받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이회창은 충청권의 김종필을 배척하고,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와 심각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1997년 대선 토론에서 이인제와의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결국 이회창은 제15대 대선에서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이인제의 독자 출마를 막지 못한 것과 3김 정치 청산을 주장해 김종필과 자유민주연합을 자극한 것이 DJP연합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회창의 강한 정치적 입장은 2002년 제16대 대선에서도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보수 우파 진영이 분열된 상태에서 김영삼과 박근혜는 이회창을 지지했지만, 김종필과 다른 여러 우파 정치인들은 그를 지지하지 않거나 중립을 지켰습니다. 또한, 이기택 등 일부 정치인들은 이회창과의 갈등으로 인해 노무현을 지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회창은 1997년 추석에 전두환과 비밀리에 사면 문제를 논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비판을 받았으며, 차떼기 사건과 아들들의 병역 논란도 그를 궁지로 몰았습니다. 병역 기피 의혹은 법적으로 무혐의 처리되었지만, 차떼기 사건과 전두환 사면 추진은 그의 청렴한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회창은 대선에서 연달아 패배하게 되었으며, 그의 정치적 실패는 갈등과 스캔들로 인해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2017년, 이회창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경험을 담은 회고록을 출간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정치적 여정을 되돌아보며, 그간의 가치관과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또한, 그는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 대표와 유사한 점이 많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법조인 출신이며, 국무총리직을 역임한 후 정치에 입문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회창은 '원칙과 소신'으로 정치적 권위에 도전한 인물로 평가되는 반면, 황교안은 '안정과 순종'으로 기존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이회창은 현재 팔순을 넘긴 고령으로,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한 상태입니다. 그는 정치에 복귀할 가능성에 대해 분명히 부정하며, 새누리당의 평당원으로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최근 2024년에는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조치와 관련해 강한 비판을 쏟아내며, 여당인 국민의힘과 민주당 모두에게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는 2017년 유승민 전 의원의 대선 출정식에 등장한 이후로는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2024년도 국민의힘의 초선 의원인 정연욱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전 총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이 전 총재에게 인사를 드렸다고 밝혔습니다.
이회창의 정치 경로와 그가 남긴 영향력은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그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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